로그 제작기 2 — 세계관부터 세웠다: 동양 신화와 현대의 결합
로그 제작기 시리즈
세계관을 만들기 전에 정한 원칙
세계관을 쌓기 시작하면서 먼저 세 가지를 정했다. 이후의 모든 결정은 이 원칙에 비춰 판단했다.
- 서양이 아니라 우리나라와 동양의 역사·신화를 주재료로 쓴다. 서양 중세 판타지는 이미 너무 많아서, 같은 재료로는 차별점을 만들기 어렵다. 반대로 삼국 시대 유적이나 한국 요괴는 게임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 전통만 쓰지 않고 현대를 섞는다. 순수한 사극풍은 무겁고 좁다. 기와지붕을 인 고층 빌딩, 전봇대에 매달린 연등처럼 두 시대가 부딪히는 장면이 이 세계만의 인상을 만든다고 봤다.
- 설정은 반드시 게임 규칙으로 이어져야 한다. “모양만 한국풍”이면 의미가 없다. 요괴의 전설이 그대로 그 요괴의 행동이 되고, 이야기 속 사건이 보스 공략법이 되게 한다.
주인공이 정해지기까지 — 세 번의 변화
세계관은 주인공 한 명에서 출발했다. 처음부터 지금의 로그였던 건 아니다.
첫 번째: 방주
처음 Claude가 제안한 캐릭터는 “방주” 였다. 종이로 접은 배 모양 몸통에 컨테이너 박스를 싣고, 조타륜 문양이 있는 선장 모자를 쓰고, 그래프가 비치는 랜턴을 든 캐릭터다. 필명 ‘노아’에서 노아의 방주를, 평소 다루는 컨테이너와 쿠버네티스(그리스어로 조타수)에서 소품을, 관측 가능성 작업에서 “어둠 속 버그를 비추는 랜턴”을 가져왔다.
개인적인 연결고리는 많았지만, 요소가 너무 많아 작은 픽셀 크기로는 알아보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랜턴으로 숨은 것을 비춘다는 발상은 끝까지 살아남아 게임의 핵심 도구가 됐다.
두 번째: 서양식 탐정 로그
챗지피티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자 “로그(Log)” 라는 이름의 작은 탐정이 나왔다. 숨겨진 오류를 추적하는 탐정, 그리고 개발자라면 바로 알아듣는 ‘로그’라는 이중 의미. 이름은 마음에 들었지만 탐정 모자, 트렌치코트, 돋보기 조합은 누구나 떠올리는 전형이라 참신함이 부족했다.
세 번째: 삼국 시대 탐정 로그
그래서 “고구려·백제풍인데 현대적이고 판타지스러운 탐정”으로 방향을 틀었다. 서양 탐정의 상징을 같은 역할을 하는 삼국 시대 요소로 하나씩 바꿨다.
| 서양 탐정 | 로그 | 바꾼 이유 |
|---|---|---|
| 탐정 모자 | 새 깃털 두 개를 꽂은 조우관(고구려 벽화 속 관모) | 작은 크기에서도 실루엣이 또렷하다 |
| 트렌치코트 | 고구려식 저고리를 짧게 재단한 먹색 코트 | 현대적인 실루엣을 유지하면서 시대감을 준다 |
| 단안경 | 청동거울 조각으로 만든 단안경 | 청동거울은 삼국 시대의 의례용 신물이라 “숨은 것을 비춘다”는 역할과 맞는다 |
| 돋보기 | 백제 금동대향로를 줄인 랜턴 | 방주의 랜턴 발상을 이어받았다 |
색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가져온 먹색, 주홍, 황토, 청록, 금색으로 제한했다. 벽화 색감 자체가 이 세계의 정체성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무대: 연옥
“약간 연옥 같은 세계”라는 요청을 한국식으로 옮기면서 서양의 연옥 대신 이승과 저승 사이의 경계라는 개념을 썼다. 장승과 솟대가 원래 마을의 경계를 지키는 존재라, “경계의 세계”라는 설정과 자연스럽게 맞물린다.
- 해가 검게 멈춰 있다. 금빛 코로나를 두른 일식. 낮도 밤도 아닌 시간이 연옥의 분위기를 가장 직접 보여준다.
- 시간이 멈춘 곳에 모든 시대가 흘러들어와 가라앉았다. 삼국 시대와 현대가 한 화면에 있는 이유다. 이유 없이 섞으면 어색하지만, “시간이 멈춘 경계 세계”라는 설정이 있으면 콜라보가 세계의 성질이 된다.
- 장군총(고구려 계단식 돌무덤), 기울어진 오층석탑, 기와지붕을 인 고층 빌딩, 청사초롱을 단 현대식 가로등, 전봇대에 매달린 연등이 한 스카이라인에 있다.
적: 왜 십이지신인가
적을 정할 때 가장 오래 고민한 건 “왜 이들과 싸워야 하는가” 였다. 처음엔 오류 벌레, 도깨비불 같은 흔한 적을 넣었는데 “창의적이지 않다”는 피드백을 받고, 하회탈과 한국 요괴, 그리고 인간화된 십이지신으로 바꿨다.
십이지신을 적으로 쓰는 이유는 이렇게 만들었다.
- 십이지는 원래 시간(열두 시진) 을 나타낸다. 그래서 연옥의 하루가 열두 시진으로 나뉘고, 각 시진의 문을 그 시간의 십이지신이 지킨다. 문이 차례로 돌아야 시간이 흐르고 넋들이 제 길을 찾아간다.
- 십이지신은 원래 명부의 수문장이었는데, 연옥에 퍼진 “오류” 에 물들어 폭주했다. 그들이 문을 잠가 연옥의 시간을 멈춰 세웠다.
- 그래서 보스를 쓰러뜨리는 건 죽이는 게 아니라 오류를 고쳐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이다. 오류를 추적하는 탐정이라는 주인공 설정과 한 단어로 이어진다.
외형은 김유신 장군묘 호석의 십이지신상처럼 동물 머리에 사람 몸, 삼국 시대 갑옷과 무기를 기본으로 하고, 각자 현대 소품 하나를 더했다. 공사장 안전 조끼를 입은 소, 무전 이어피스를 꽂은 호랑이, 라이더 재킷을 걸친 개마무사 말, 확성기를 든 닭, 선글라스를 쓴 부자 돼지, 정장에 금관을 쓴 용. 오염의 표시는 모두 청록색 눈과 균열로 통일했다.
십이지신과 맞서는 로그. 오염된 존재는 모두 청록빛을 띤다
요괴: 전설이 곧 행동이다
일반 적인 요괴는 “전설 속 특징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긴다”는 원칙으로 골랐다.
| 요괴 | 전설 | 게임 속 행동 |
|---|---|---|
| 하회탈(양반·초랭이·이매) | 탈마다 다른 인물 | 거만하게 걷는 양반, 촐싹대는 초랭이, 비틀대는 이매 |
| 어둑시니 | 쳐다볼수록 커진다 | 랜턴을 비추면 커지고, 끄면 줄어든다 |
| 장산범 | 사람 목소리를 흉내 낸다 | 로그의 움직임을 1초 늦게 따라 한다 |
| 불가사리 | 쇠를 먹는다 | 쇠 발판을 갉아먹어 길을 없앤다 |
| 두억시니 | 머리를 짓누른다 | 위에 숨어 있다가 밑을 지나가면 떨어진다 |
| 창귀 | 호랑이에게 잡아먹혀 호랑이를 섬긴다 | 다른 요괴를 불러 빠르게 만든다 |
알고 보면 재밌는 적, 한국 신화를 아는 사람은 “아, 그래서 저렇게 움직이는구나” 하고 웃을 수 있는 적을 만들고 싶었다.
이야기: 달토끼
세계관의 감정선은 십이지신 중 묘(卯), 달토끼에게 맡겼다.
- 하늘의 신 환웅이 로그에게 십이지신을 바로잡으라 명한다.
- 달토끼가 십이지신의 첩자로 로그에게 접근한다.
- 함께 사건을 쫓다가 로그를 사랑하게 되고, 자신의 절구공이를 칼자루로 삼아 연옥 입구에 숨겨 두고 십이지신의 약점을 흘린다.
- 배신의 대가로 십이지신에게 정신개조를 당한다. 기억은 오류로 덮였지만, 로그를 향한 감정은 남아 있다.
- 로그는 세뇌된 그녀와 싸워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며 길을 떠난다.
여기서 몇 가지가 서로 맞물린다.
- 게임 첫 장면에서 주운 칼자루가 그녀의 절구공이라서, 그 칼로는 그녀를 벨 수 없다. 그래서 토끼 보스전은 칼이 아니라 랜턴 빛으로 오염을 걷어내는 싸움이 된다.
- 그녀가 흘린 약점(“쥐는 흩어졌을 때 가장 약해, 소는 벽에 부딪히면 멈추고…”)이 실제 보스 공략법이다. 그녀의 배신이 로그를 도왔다는 걸 플레이로 체감하게 된다.
- 네 번째 문에서 그녀를 되찾지만, 용의 그림자가 그녀를 다시 납치한다. 남은 여덟 개의 문을 넘어야 할 이유가 거기서 생긴다.
환웅은 처음에 모습을 그렸다가, 결국 목소리로만 등장하게 바꿨다. 직접 보여주지 않는 쪽이 더 신적인 존재로 느껴지고, 픽셀 캐릭터들과 화풍이 어긋나는 문제도 사라졌다.
챗지피티가 세계관 문서를 읽고 그린 스토리 컷. 몇몇 대사는 게임에 반영했다
설정화와 설정이 어긋날 때
세계관 문서를 챗지피티에 넘겨 설정화를 받았더니, 결과가 인상적이었지만 설정과 어긋난 곳도 있었다.
- 홍살문이 일본 도리이로 그려졌다. 위쪽 가로대가 휘어진 도리이와, 두 기둥 위에 화살 모양 살을 촘촘히 세운 홍살문은 모양이 다르다. 한국 세계관이 이 게임의 차별점이라 가장 신경 쓴 부분이다.
- 로그의 깃털이 세 개로, 토끼의 귀와 눈이 분홍색으로 그려졌다.
- “혜시(돼지)”라는 오타가 있었다(해시가 맞다).
자세한 사례와 조치는 4편에 정리했다. 이후 모든 이미지 프롬프트에 “홍살문은 도리이가 아니다”를 구조까지 설명해 못박았다. 이미지 생성 AI는 학습 데이터에 많은 쪽으로 끌려가는 경향이 있어서, 덜 알려진 한국 문화 요소일수록 명시적으로 구조를 설명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정리
이 세계관은 완성품이 아니다. 지금 게임에 들어간 설정만 해도 열두 시진 중 일부는 이야기 비중이 거의 없고, 환웅과 용의 관계, 오류의 기원 같은 큰 질문도 비워 뒀다. 다만 “설정이 규칙이 되고, 규칙이 설정을 설명한다”는 원칙은 앞으로 세계관을 넓힐 때도 지킬 생각이다.
다음 편에서는 이 세계관을 챗지피티가 그린 설정화로 먼저 둘러본다.

